그의 고난에 참여하라
- Asher Intrater
- Dec 10, 2021
- 3 min read
-아셰르 인트레이터

고통을 나눌 때에만 비로소 갖게 되는 깊은 친밀함의 장소가 있습니다.
이것은 “경건한” 종류의 고통을 말합니다. 그릇된 일을 하고 그 결과를 거두는 데서 오는 또 다른 종류의 고통이 있습니다. 무고한 자를 공격하는 세상의 악으로부터 오는 고통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가장 높은 의미는 주님을 섬기기 때문에 핍박을 받아서 오는 고통입니다.
이것을 “그의 고난에 참여함”이라고 합니다.
빌립보서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이 말씀은 예슈아의 형상을 본받는 세 가지 영역에 대해 말합니다. 첫째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둘째는 그분을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신, 역동적인 영 능력을 아는 것이며, 셋째는 그분의 고난에 참여함을 아는 것입니다.
참여함(교제)라는 단어는 코이노니아입니다.
고난이라는 단어는 파쎄마이며, “수난passion, 비애pathos, 동정sympathy” 등의 관련 단어가 있습니다.
형상을 본받는 것은 수그-모르포스입니다. 모르프Morph/모르페Morphe는 형태를 의미합니다. “수그sug” 또는 “sym”은 함께라는 의미로, sympathy(공감), symphony(교향곡), synerge(시너지), synchronize(동시에 일어나다) 등에 사용됩니다.
예슈아께서는 악한 세상에서 의인으로 고난을 받으셨고, 우리도 그분을 따르도록 부르심을 받았기에, 그분이 겪으신 고난과 비슷한 고난을 경험해야 하는, 믿음의 중요한 측면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고통을 생각하면 움츠러듭니다. 고통 그 자체는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경건하게 고난을 받을 때, 예슈아와의 감정적인, 그리고 영적인 친밀함이 있습니다. 그분도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우리가 그 경험의 일부를 그분과 나누는 것입니다. 경험을 나누는 것은 아름답습니다. 고통 속에서의 친밀함은 소중합니다. 그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고통을 함께 나눈 경험은 예슈아 뿐만 아니라, 또한 비슷한 고통을 받은 다른 이들과도 있습니다. 요한은 이것을 ‘환난에 동참하는 자’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1: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환난…에 동참하는 자라
이 고난의 교제를 통해서 우리는 더욱 예슈아를 닮게 되고, 또한 고난의 경험을 함께 나누게 됩니다. 그렇게 공유하는 경험 가운데 연합(하나됨)의 자리가 있습니다.
동반자라는 단어는 수그-코이노노스로, “교제”라는 단어와 같지만, 위의 수그-모르포스와 같이, “수그”를 붙여서 더 강조하는 것입니다.
환난이라는 단어는 새 언약 전체에서 동일한 단어인, 쓸립시스입니다. 예슈아께서, 비록 우리가 이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6:33). 우리가 세상에서 떠날 수 있도록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보호받도록 기도하셨습니다(요 17:15).
최근에 친한 친구와 함께 한 경험이 있습니다. (개인의 안전과 신원을 보호하기 위해서 세부적인 내용들은 모호하게 합니다.) 이 분은 귀한 지도자이며, 신앙으로 인해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최근에 비밀 장소에서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분에게 위협이 곧 닥칠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애정과 격려의 포옹을 해주기 위해 갔습니다.
제 편에서는, 제 영 깊은 곳에서 고통이 느껴지는, 어떤 힘든 경험을 했습니다. 저는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사실 저는 그 고통을 지고 있으면서 좀 외롭기도 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그는 내가 경험한 것 이상을 경험했겠구나.” 저는 같은 고통의 자리를 조금 “만져주기” 위해서 그에게 포옹을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를 껴안는 순간,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저는 제 마음 가운데 고통의 자리를 만져준 그의 마음에서 무언가가 나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초자연적인 치유의 전달이 있었습니다. 저는 고통이 떠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순간은 짧았지만, 아주 깊었습니다. 고통의 지점이 다른 사람의 고통의 지점과 닿았습니다. 영, 전달, 하나됨, “수그-코이노니아”, 즉 치유 안에서 연합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사야 53장 5절의 표현을 생각하며 걸어왔습니다. 그가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히브리어로:
בחבורתו נרפא לנו
예슈아께서 상처 받으심으로, 우리의 상처가 치유됩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상처받으려 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상처는 치유될 수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상처 받으신 자리가 우리 상처 받은 자리를 만지고, 우리를 치유합니다.
[이사야 53장의 표현은 다소 독특하고, 조금 헷갈립니다. “상처”라는 단어의 “베이트”에는 “발음 구분 기호”인 점이 없습니다. 그 점이 있으면 “상처”이고, 점이 없으면, “교제”입니다. 본문에서 상처(하부b라)와 교제(하부v라) 사이에 언어유희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상처와 그분과의 교제를 통해 고침을 받았습니다. 교제와 상처는 서로 점 하나 차이입니다.]
로마서 11장 17~24절에 나오는 올리브 나무 비유에서 ‘접붙임’의 의미를 생각해봅시다. 이 비유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올리브 나무로 연합되는 것을 묘사합니다. 우리는 믿음의 나무에 접붙여진 가지들입니다. 가지가 접붙여지기 위해서는 가지가 잘라져야 합니다. 껍질이 벗겨진 가지의 속 부분이, 다른 벗겨진 나무에 결합될 수 있습니다.
나무 껍질 부분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합니다. 껍질이 붙어 있으면, 두 가지는 접붙일 수가 없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의 열린 곳과 상처난 곳이 우리가 함께 결합될 수 있는 곳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하나가 되는 댓가는, 서로의 아픈 곳들을 드러내고 만지는 것입니다.
접붙임을 통해, 우리는 수액을 통해 흐르는, 뿌리의 기름진 것과 풍성한 것을 경험합니다(로마서 11:7). 수액은 나무 껍질 밖으로 흐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더 안에 있는, 부드럽고, 더 섬세하고, 젖은 나무를 통해 흐릅니다. 연합할 때, 우리는 서로의 축복도 받을 수 있습니다. 생명의 흐름을 주고 받는 일이 있습니다.
이것은 “마음의 할례”라고 하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로마서 2:29, 골로새서 2:11, 예레미아 4:4, 신명기 10:16, 30:6.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그리고 서로에 대해 마음을 엽니다. 마음은 열기 위해서는 마음을 잘라야 합니다.
물리적인 할례는 날카로운 메스로 합니다. 마음의 할례는 십자가에서 예슈아의 옆구리를 찔렀던 창으로 하는 것입니다(요한복음 19:34, 스가랴 12:10). 십자가는 우리 마음을 자르는 할례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신비이고,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는 교제의 신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