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1장의 예슈아: 여호와, 예수, 심판
- Asher Intrater
- Jul 22,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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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이름은 원래 예슈아ישוע입니다. 예슈아는 원래 여호수아, 곧 원어로 예호슈아יהושע의 축약형입니다. 여호수아는 여호사밧 혹은 예호샤팥יהושפט이 여호와께서 심판하신다는 뜻인 것처럼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지 못하지만 예슈아라는 이름 안에는 YHVH 혹은 여호와라는 이름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셨듯, 예슈아께서는 심판하고 전쟁을 일으키며 열방을 다스리기 위해 다시 오실 것입니다(요한계시록 19:11-16).
마지막 때 사건들을 살펴보면 우리 대부분의 신학이나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이해의 틀에 맞출 수 없는 엄청난 재앙과 심판이 있습니다.
마지막 때 사건과 출애굽 이야기의 사건 사이에는 많은 유사점이 있습니다. 랍비들은 “마지막 구속은 첫 번째 구속과 같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메시아의 오심과 세상의 종말은 출애굽기에 나오는 패턴에 기초할 것입니다. 모세와 마찬가지로 메시아도 그렇습니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애굽에 대재앙을 내리셔서 제국을 멸망시키시고 회개하게 하시며 백성들을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모세)을 사용하셔서 그 재앙을 내리는 권세를 행사하게 하셨습니다. (히브리어로 재앙을 뜻하는 단어는 마코트(מכות)로 ‘치다, 때리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열 번의 타격’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재앙은 또한 “파괴자”의 공격으로 묘사되기도 했습니다(출애굽기 12:13). 그러나 본문의 강조점은 재앙이 하나님에 의해 시작되었고, 하나님의 인간 대리자가 집행했으며, 미리 정해진 목적을 가지고 행해진 형벌이라는 점입니다. 각 재앙의 시작과 끝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에 순종한 모세와 아론에 의해 통제되었습니다.
이러한 유형의 사건은 마지막 때에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댄 저스터의 <유월절, 계시록을 여는 열쇠> 참조) 바로의 제국을 본뜬 사악한 적그리스도 제국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제국을 멸망시키기 위해 거대한 심판을 내리실 것입니다. 재앙의 목적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악인들에게 임박한 저주를 경고합니다.
죄인들을 회개와 구원으로 인도합니다.
성도들을 더 큰 믿음과 순결로 단련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상에 있는 백성들이 당신의 심판에 적극적으로 동의하기를 기대하십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믿음으로 하나님과 협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어떻게 일치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모두 알아야 합니다(로마서 11:22).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에 대한 이해를 넓혀야 합니다. 마지막 때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지막 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특성을 이해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첫 장에서 예슈아께서 누구신지에 대한 계시가 이 책의 나머지 모든 사건들보다 먼저 나옵니다.
예슈아께서 탄생하셨을 때, 사람들은 그분이 인간의 모습으로 영광스럽지 않은 평범한 몸을 가진 하나님이심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분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도 제자들은 그분이 누구신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분은 다른 모습으로 오셨고, 그분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계시가 필요했습니다(누가복음 24:13-31).
출애굽기 6:1-8에서 모세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백성들이 자신을 엘샤다이라는 이름으로 알고 있었지만, YHVH(여호와)라는 이름으로는 알지 못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그분이 민족의 심판과 구원을 가져오기 위해 행동하실 다섯 가지 혹은 여섯 가지 방법을 열거하는데, 이는 그분의 이름인 YHVH의 특징입니다.
지금 우리도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갈릴리 바다를 걷는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을 하늘 군대의 지휘관, 온 땅의 심판자, 하나님의 진노의 집행자, 전능하시고 “판토크라틱”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왕인 여호와-예슈아로는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 앞에 닥친 사건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예슈아께서 누구신지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밧모섬에서 요한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욥도 회오리 바람으로, 모세는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제자들은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요한은 밧모섬에서의 경험으로 충격을 받고 변화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각기 밧모섬 같은 경험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예슈아를 감당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요한계시록의 사건들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이 바로 이런 일이 일어날 때입니다. 지금은 중요한 “카이로스” 전환의 순간입니다. 요한계시록 1장을 읽고 깨달아 책의 나머지 사건을 받아들이고 경험할 수 있도록 합시다.
율법과 선지서에서 여호와-천사는 이스라엘 밖에 있을 때는 영광스러운 신적인 모습으로, 이스라엘 안에 있을 때는 평범한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저의 책 “아브라함의 점심 데이트”에서 천사-여호와가 30번 이상 나타난 것에 대한 설명을 참조하십시오.)
예슈아께서는 영광과 불의 모습과 영광스럽지 않은 인간의 모습이라는 두 가지 모습이 있으십니다. 그분은 처음에 나귀를 타고 평범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스가랴 9:9, 마태복음 21:1-9). 그러나 두 번째는 불의 눈을 가진 백마를 타고 영광스러운 신적인 모습으로 오실 것입니다(다니엘 7:13-14, 요한계시록 19:11-16).
우리는 전염성 바이러스에 대처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자연의 3분의 1이 파괴되고 인구의 3분의 1이 죽는다고 합니다(요한계시록 9:13-18, 16:1-9)! 요한계시록의 사건을 이해하려면 요한계시록의 예슈아를 알아야 합니다.
예슈아께서 처음 등장하셨을 당시 많은 유대인들은 예슈아를 잘못 이해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도 두 번째 등장하시는 예슈아를 오해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것은 더 이상 이론적인 신학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마지막 시대로 넘어가고 있으며, 마지막 때 예슈아를 알아야 합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바로와 맞서기 전에 여호와의 강력한 심판과 구속의 방법을 이해해야 했습니다. 우리도 종말에 직면하기 전 예슈아를 “여호와-예수님”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강력한 심판과 구속의 방법도 예슈아의 이름 안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을 보내어 바로의 악한 제국에 맞서게 하셨듯이 여호와-예슈아도 마지막 때 짐승의 악한 세력에 맞서도록 우리를 보내십니다(요한계시록 11:8). 여호와라는 이름의 권위는 예슈아라는 이름 안에 있습니다. 출애굽의 외침과 출애굽의 순간을 재개합시다. “내 백성을 가게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