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교개혁은 아마도 역사상 가장 가장 중대한 교회의 전환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교회에 망치와 못을 들고 나타나, 95개조 반박문으로 카톨릭 교회의 교황들과 주교들에 맞서기 전까지 에클레시아(교회) 전체가 배교 상태였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러나 당시 (공식적인 교회 구조 안팎에서) 주님의 일들을 드러낸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존 위클리프-그는 영국인들이 모국어로 된 성경을 소유할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때는 인쇄술 개발 전이라서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로 된 사본을 구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성경이 말씀하는 바를 알기 위해 사람들은 전적으로 주교에게 의존하게 되었고, 때로 불가타역(가장 많이 사용된 라틴어번역 성경)은 카톨릭 교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헬라어를 잘못 해석했습니다(아래 에라스무스 참조).
“위클리프가 지적했듯, 교계는 평신도가 성경에 접근할 수 없도록 할 만큼 상당한 기득권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주교와 성직자들의 생활방식과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실천했던 생활방식 사이에 엄청난 불일치가 있음을 발견했다.”
위협이 된 그는 왕따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과 사도들의 참된 가르침을 발견하면 주교들을 배반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위클리프는 핍박에 맞선 용기와 진리의 표상입니다. 성경이 그의 이름으로 전 세계 사람들의 모국어로 번역되었다는 점에서 그는 여전히 기려지고 있습니다. (https://www.wycliffe.org참조)
에라스무스- 인본주의자였는데, 600년 전 이 말 자체가 완전히 다른 의미였습니다. 그의 시대에 인본주의자는 보다 진정한 시대를 되돌아보는 사람이었습니다. 신앙인으로서 그는 현상 유지를 하는 이들에게 도전했습니다. 그는 루터의 동시대 친구이자 (이견이 있는) 친구였으며 믿는 자들의 제사장직 사상을 그대로 반영했습니다. “죄를 하나님께 직접 고백할 수 있는데 왜 다른 사람에게 죄를 고백하는가? 에라스무스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위클리프와 마찬가지로, 에라스무스도 교회가 평범한 사람이 성경 읽는 것을 금지했을 때 말했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중세 후기 종교의 고인 못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신선하고 살아있는 물을 마실 수 있도록 모든 이들에게 가용한 것이 되어야 하고,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아드 폰테스(Ad fontes)는 근원으로 돌아감을 의미합니다. 기독교계를 통치하는 주교와 교황이 그 근원에서 떠났다는 의미입니다. 에라스무스는 “기독교의 권리증서 즉, 초대 교회와 신약의 저자들에게로 바로 돌아갈 것”을 촉구했습니다.
그 역시 카톨릭 교회의 신학 독점에 대한 현상 유지에 큰 위협이 되었기에 왕따가 되었습니다.
시에나의 성녀 카테리나- 카테리나를 흔히 망상을 가진 이로 일축하기 쉽습니다. 거의 먹지 않는 사람이 환각에 빠지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에 하루 걸러 한 번씩 누군가 천국에 갔었다고 주장하거나, 하나님 음성의 직통 계시를 주장하는 것 같과 습니다. 그들은 책 판매와 유명세로 이익을 얻었지만, 캐서린은 자신을 희생하고 “생명이 있다면… 천 번이라도, 성령님이 내게 영감을 주시는 대로 할 것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33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카테리나는 환상 뿐 아니라, 가난하고 병든 자들에 대한 헌신과 자기 부인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따랐습니다.
“1370년에 그녀는 ‘신비한 죽음’이라고 불리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녀는 신과 황홀한 연합으로 올라갔을 때, 4시간 동안 그녀의 몸은 생명이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 경험 후 그녀는 타협하고 있는 정치 문제에 대해 맞서야 한다는 성령의 강권하심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당시 교회와 국가는 종종 같은 실체이거나 적어도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때로는 치명적인 적들이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교황은 땅과 백성을 통제했습니다.
1377년에 그녀는 5일 동안 또 다른 방문을 경험했습니다. 그것으로 그녀는 자신의 최고작 <대화>를 썼습니다.
믿는 자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믿으면서도 그것을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카테리나는 세 분을 하나로 보고 하나님에 대해 그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오 영원하신 삼위일체여! 오 하나님이여! 삼위일체 하나님, 당신의 신성한 본성은 당신 아들의 피 값에 그 가치를 주었습니다. 영원한 삼위일체이신 당신은 깊은 바다이십니다. 당신에게 들어갈수록 더 많이 발견하고, 더 많이 발견할수록 더 많이 당신을 찾습니다… 영원한 삼위일체이신 당신은 장인이십니다. 당신의 작품인 제가 당신께서 직접 만드신 것의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계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 아들의 피로 저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오 심연! 오 영원하신 하나님! 오 깊은 바다여! 당신이라는 선물보다 당신께서 제게 무엇을 더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녀의 가장 큰 기쁨은 주의 만찬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서 그녀는 종종 ‘삼위일체의 깊이를 맛보았습니다.’” 한 편으로 저는 카톨릭 교회가 주의 만찬을 도구나 수단으로 사용하고 그것을 부인함으로써 어떻게 오용했는지에 대해 큰 문제를 제기합니다. 반면에, 저는 오늘날 대부분의 믿는 자들보다 그들이 그 당시 성찬식을 훨씬 더 중요시했다는 사실에 깊이 감사합니다. 그것은 진정 신성한 경험이었습니다.
카테리나는 또한 강력한 복음전도자였습니다. 큰 무리들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그녀의 말씀을 듣거나 그녀를 보았던 수많은 이들이 회심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의 은사가 “영적 엘리트”만이 아니라, 모든 믿는 자를 위한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믿었던 주교들은 일반 신자가 은사를 사용할 자격이 없고 신뢰받을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녀는 자신보다 앞선 신비주의자들은 이사야 11장에 열거된 일곱 영을 사용했기에, 12가지 영적 은사를 최초로 알았던 이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매우 젊은 나이에 사망했습니다. “더 이상 먹을 수도, 물을 삼킬 수도 없게 된 그녀는 1380년 33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로마에서 살았습니다.” 기독교 예술가 출신인 리치 멀린스는 다음 삶에 대한 갈망에 대해 노래했습니다. 그는 카테리나처럼 매우 젊은 나이에 사망했습니다. 그저 이 세상을 위한 사람이 아닌 이들이 있습니다.
보나벤투라-그는 지성을 초월한 더 깊은 수준에서 주님을 경험하기 위해서 “성령과 개인적으로 씨름한 것을 묘사합니다.” 성 빅토르의 리차드가 가진 삼위일체 개념은 흥미로웠습니다. 자기 사랑에서 벗어나려면 다른 이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둘이 함께 있으면 둘 사이의 자기 사랑이 될 수 있으므로, 하나가 더 있어야 합니다. 저는 이것을 교회 생활의 모델로 봅니다. 교회가 손을 뻗지 않으면 자기 사랑의 예가 됩니다. 진정한 사랑은 항상 더 많은 영혼들에게 뻗어 나가 그들을 이끌어 오기 원합니다.
빙겐의 힐데가르트- 그녀는 “자신의 중년에 경험한 회복을 개인적 오순절 사건이라고 이해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운 오순절 체험을 구해야 하지 않습니까? (헬프타의) 제르트루다는 성령을 ‘꿀보다 더 덜다’고 묘사하며, [그분을 통해] 하늘의 모든 능력이 확립된다고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단순한 본보기가 아니라, 리더들이었습니다. 수도원의 지도자로서 자신들의 생각을 확장할 수 있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투사였으며 두 개의 수녀원을 시작했습니다. 물론 큰 영적 은사를 가진 사람이라면, 그 은사로 사람들의 마음을 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힐데가르트는 또한 경건한 성품과 영적 딸들에 대한 깊은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신비주의자들은 권력이나 지위에 관심이 없었고,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있었으며, 그것은 다른 이들에게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수도원의 지도자일 뿐 아니라, 운동 조직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실수와 과잉에 대한 조심스러운 주의와 교훈
한 가지 생각할 것은 책임입니다. 그들은 누구와 함께 계시를 다루고 있었습니까? 우리는 성경을 연구함으로써 신학을 발전시킵니까? 아니면 신성한 존재가 우리에게 성경을 설명하는 초자연적인 방문을 통해서입니까?
저는 누군가가 말씀의 의미를 나눌 때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셨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미국에서 매우 유명한 한 선지자는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본 이유가 그녀가 중보자였고 백성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들은 롯의 손님들을 모욕하려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롯은 그 대신 두 처녀 딸을 바쳤습니다. 롯의 아내가 중보자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지만, (특히 여기서는 아브라함이 중보자입니다.) 이 사람의 설명은 마치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 그대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식으로 계시를 받는 것을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또 다른 문제는 권세의 구조입니다. 어떤 사람이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고 은사를 받았을 때, 우리는 그들이 아무 잘못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유혹을 받습니다. 저는 어젯밤에 자신의 추종자를 섹스 사이비 집단으로 이끈 것으로 드러난 은사주의 랍비에 대한 이스라엘 TV 방송을 보았습니다. 한 아내가 자기 남편에게 걱정을 표하자 남편은 “그 랍비는 너무 순수해서 그런 짓을 할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그 랍비가 여자에게 키스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모든 인간을 동일하게 보기 때문이지 성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이비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우리가 사도들의 삶에 있었던 하나님과의 경험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사도행전 2:1~4), 우리는 우리 믿음이 체험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있다는 것을 항상 확인해야 합니다. 경험은 아주 좋은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흔들리지 않는 진리의 기반입니다.
종교개혁을 일으킨 요인들
종교개혁을 일으킨 요인들은 많습니다. 다음은 몇 가지 핵심 사항들입니다.
교황과 주교들 가운데 있던 부도덕과 부패. “교황 알렉산더 6세는 보르자 가문의 일원으로, 아마도 치명적인 만찬으로 기억되는데, 그는 여러 명의 여성들과의 사이에서 적어도 알려진 것만 7명의 사생아를 두었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1942년 교황 선거에서 뇌물을 주어 승리했습니다.” 많은 성직자들이 임명된 것은 그들이 가진 경건함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인맥 때문이었습니다.
평신도들은 점점 더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치 억압적인 정권에서 사람들이 인터넷에 접속해 실제 이야기를 알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성직자들이 받는 세금 감면과 특혜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과거와 달리 사람들은 불만에 대해 쓸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의 글을 읽을 수 있습니다.
평범한 신자들이 성경을 접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용납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움직일 수 있는 피조물에게 강요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에라스무스는 헬라어 본문과 불가타 본문 사이의 불일치를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교회는 성례가 성경에 없는데도 성경에 있는 것처럼 보이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시의회는 귀족적인 통치 방식을 대체하고 있었습니다. “중세 세계관은 고정적이었습니다. 누군가는 출생과 사회적 전통에 따라 사회 내에서 지위를 분배받았습니다.”
우리는 우리 선조들에게서 배울 것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핍박 속에서도 타협하지 않을 개혁자들을 항상 찾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