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충일과 독립기념일
- Asher Intrater
- May 6,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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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이스라엘에서 우리는 테러 공격이나 국가 수호를 위해 싸우다 목숨을 잃은 이들을 기억하는 현충일을 맞았습니다. 다음 날은 독립기념일을 기념했습니다. 연이어 있은 이 두 기념일은 이스라엘의 고난과 구속의 상징입니다.
이스라엘의 고난 및 회복은 예슈아(예수님)의 죽음 및 부활과 깊고 신비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그 연관성은 성경적이고 영적이며 하나님의 예정된 계획의 일부라는 점입니다. 이 개념은 믿는 자들의 믿음이 예슈아의 죽음 및 부활과 연결되는 방식과 유사하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에게 그리 놀라운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6:5-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믿는 자들의 거듭남은 예슈아의 죽음과 부활의 연장이자 결과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유랑 생활과 회복도 예슈아의 죽음과 부활의 연장이자 결실입니다. 예슈아께서 세상의 구주이시므로 그분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대리 경험할 것입니다. 예슈아께서 이스라엘의 왕이시기 때문에, 우리 민족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분의 죽음과 부활의 패턴을 따를 것입니다.
호세아 6: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이 말씀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메시아께서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새 언약의 약속의 근거이기도 합니다(누가복음 24:46). 무덤에서 이틀 후에 예슈아께서 부활하신 것은 이스라엘이 2천 년 동안의 유랑 생활 후 회복된 것과 비슷합니다.
에스겔의 마른 뼈 예언이 죽은 자의 부활 뿐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을 말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에스겔 37:12-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메시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면, 그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는 반드시 부활이 있어야 합니다. 메시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면, 그분이 왕이 되실 나라의 회복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요한복음 18:37, 19:19).
이 패턴은 성경 전체에서 반복됩니다. 메시아를 예표하는 왕 다윗이 범죄할 때 백성이 고통을 당합니다(사무엘하 24:17). 예슈아께서 태어나셔서 애굽으로 내려오신 것은 이스라엘의 출애굽의 성취입니다(마태복음 2:15, 호세아 11:1). 이스라엘 땅에 대한 공격은 메시아께서 맞으신 채찍질에 비견됩니다(시편 129:3).
이스라엘의 고난은 예슈아께서 십자가에 달리심과 비슷합니다. 이 놀라운 연관성은 유명한 유대인 예술가 마크 샤갈이 하얀 십자가 (1938), 집착 (1943), 노란 십자가 (1943), 대탈출 (1953-66)과 회색 십자가 (1970)와 같은 작품들로 표현했습니다.
랍비들의 전통은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는데, 이사야 53장이 예슈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유대 민족을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8절에 “내 백성”의 허물 때문에 끊어졌다는 말씀이 있기 때문에 이것은 사실이 될 수 없습니다. 반면에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이사야 말씀의 고통받는 종에 대한 많은 예언들이 실제로 유대 민족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예언들은 예슈아(42:1, 42:19, 49:3-7, 52:13, 53:11)와 이스라엘(41:8-9, 43:10, 44:1-2, 44:21, 48:20) 사이에 상당히 고르게 나뉘어져 있습니다.
어떻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어떤 때는 예슈아를, 어떤 때는 유대 민족을 가리킬 수 있었을까요? 그 대답은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한 개인(야곱)과 한 백성(야곱의 아들들)을 모두 지칭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은 다른 이들을 대신하여 고난 당하고 이로써 속죄를 주십니다. 이것은 주로 메시아이신 예슈아 그분의 역할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분을 섬기는 이들에게도 해당됩니다. 믿는 우리 모두는 “고난을 채우도록”(골로새서 1:24), 그리고 다른 이들을 위해 고난 받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고린도후서 1:5). 이와 같이 이스라엘 민족도 열방을 대신하여 고난을 당합니다. 그들이나 열방이나 그것을 알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때때로 그리스도인들이 고난 받는 것은 그들의 죄 때문입니다. 어떤 때는 고난이 경건한 것에서 비롯되면 구속적인 효과를 가집니다(베드로전서 4:1, 13, 15-17).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의 대부분은 단지 우리 자신의 죄의 결과였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스라엘의 고통 가운데 일부는 세상의 구속을 위한 중보적 행위로서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다시, 이스라엘의 고난은 십자가와 평행을 이룹니다. 예슈아의 속죄의 죽음은 인류에게 구원을 줄 뿐 아니라, 또한 정의를 요구합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든 거절하든 상관없이 그렇습니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세계 모든 열방 앞에서 “십자가 지는” 자리에 두실 것입니다. 모든 열방은 선택을 해야만 할 것입니다.
세계 열방이 연합하여 함께 이스라엘을 공격할 것입니다. 모든 나라는 공격에 참여하든지 중립을 지키든지 이스라엘과 함께 서든지 선택할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나라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거나 아니면 혹독한 심판을 받을 기회가 될 것입니다.
십자가가 모든 개인에게 경계선인 것처럼, 마지막 때 이스라엘에 대한 전쟁도 모든 국가에는 경계선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함께 서든지 그것을 대적하든지 말입니다. 열방 전체가 이 시험에 실패할 것이지만, 모든 나라 가운데 신실함을 지키기로 선택할 남은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