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 Asher Intrater

- Dec 17, 2021
- 2 min read
Updated: Dec 19, 2021
-아셰르 인트레이터

때로 저희는 리더로서 교만하다고, 또한 저희 개개인이나 단체가 공로를 차지하려고 한다는 비난을 받아왔습니다. 저희의 자의식과 배타성으로 행한 모든 일로 인해 그렇게 느꼈던 분들께 용서를 구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싶습니다. 그런 것들은 죄이며 악한 태도입니다.
그와 정반대로 하는 것이 바른 태도라고 믿습니다. 주님께서 저희에게 진정한 겸손과 포용 가운데 행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요한복음 3장 27~30절에서 요하난(세례 요한)은 놀라운 예를 보여주었습니다.
인간은 신뢰, 기름부으심, 축복, 권위를 취할 수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위로부터 임해야만 합니다. 모든 권한은 취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왕국에 이기적인 야망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다른 이들이 축복을 받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을 축복하신 은혜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따라서 질투를 할 수 있는 여지는 전혀 없습니다. 좋은 것은 모두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누구도 그들이 받는 은혜를 받을 “자격”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이들을 축복하시기 원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 각 사람을 축복하기 원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을 “섬기고자” 할 때 우리가 내러티브의 중심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반드시 주의해야 합니다. 요한은 “나는 메시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서 우리 자신이 핵심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는 잘못되고 자기 기만적인 것입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아닌 예슈아이십니다.
제 생각에 대부분의 남성은 자신에 관한 환상의 내러티브 안에서 사는 것 같습니다. 히브리 속담에 “영화 속에서 살고 있구나”라는 말이 있습니다. 많은 남성들은 (어쩌면 여성들도 그렇겠지만 제가 남성의 심리를 더 잘 아니까) 마치 영화의 주연인 것처럼 살면서 주변에 있는 모두를 “서브” 조연들로 여깁니다. 정말 부끄러운 일이죠.
우리 모두가 배우로 나오는 실제 “영화 대본”에는 주인공이 한 분있습니다. 저도 아니고 여러분도 아닙니다. 예슈아이십니다. 신부는 누구에게 속하는가?
또한 요한은 “신부는 신랑에게 속한 것”이라 했습니다. 신부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신랑은 메시아이십니다. 여기서 결혼이나 신부에 관한 모델은 약간의 소유권을 의미합니다. 소유욕은 남성이 아내에 대해 로맨틱한 성적 감정을 갖는 것에 비유됩니다. 단순한 비유이지만 요점은 같습니다. 예슈아께서는 백성들의 애정과 관심을 원하십니다. 그들은 그분께 속한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우리에게 속한 것들에 대한 “공”을 소유하길 원하며 다른 이들을 “우리의 양떼”로 봅니다. 악하고 이기적인 것입니다. 이는 남편이 자기 아내의 관심과 애정을 끌기 위해 애쓰는 다른 남자에게 화를 내는 것처럼 예슈아를 화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상황은 기독교인이 가장 뛰어난 시민, 노동자, 애국자가 될 것을 알면서도 국가에 진정한 기독교인들의 존재를 원치 않는 정치 독재자를 연상시킵니다. 왜 반대할까요? 모든 충성과 애정이 자신을 향하길 원하기 때문이지요. 기독교인들이 뛰어난 시민일지라도 그 마음의 헌신은 다른 분께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기적이지 않은 형태의 기쁨을 배워야 합니다. 이타적으로 기뻐하며 대리만족해야 합니다. 우리는 결혼을 앞둔 신랑의 친구들와 같습니다. 신랑이 아내와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로 인해 기뻐하고 즐거워 합니다. 우리는 결혼식에서 신랑과 기쁨을 나눕니다. 신부의 관심과 애정을 끌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자아 축소시키기
마지막으로, 요하난(요한)은 예슈아는 흥하여야 하겠고 자신은 쇠하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은 흥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 성숙은 쇠하는 것을 지혜롭고 올바른 것으로 여깁니다. 그것은 혼적이고 이기적인 것을 이기는 승리입니다. 자아를 축소시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예슈아께서 “확대되시는” 것 즉, 그분이 더 크게 되시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에게 예슈아가 확대되시는 것/흥하는 것을 볼 때, 우리가 다른 이들의 눈에 작아지는/쇠하는 것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포용의 문제는 하나님의 축복이 모두에게 함께 속한 것으로 본다는 의미입니다. “내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공동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은혜로 놀라운 일을 행하실 때, 우리는 그것을 우리 모두에게 축복으로 여겨야 합니다. “우리의 것”이 아니라 우리 집단만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종들인 “우리 모두의 것”입니다.
우리는 축복과 공에 대해 다른 이들을 포함해야 합니다. 다른 이들을 배제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관해서는 특권층처럼 배타적이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께 속한 것이기에 우리는 “겸손”을 유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에게 주시기에 우리는 “포함시키려는" 태도를 유지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