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저물고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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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저물고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

텔아비브의 티페렛 예슈아 회중




“날이 저물고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 내가 몰약 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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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 4:6


영적 도전: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이 효과가 없는 것 같을 때


저는 지난 해부터 주님과 멀어진 것 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임재를 갈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에 대해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제가 그렇게 느꼈던 이유 중 하나를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코로나로 봉쇄되었던 2020년 3월부터 시작된 고통의 시기를 지나면서 제가 발을 뗐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저희 부부는 심각하게 주님을 구하고 있었고 (그 때 막 40일 간의 글로벌 예수 금식을 마친 상태였습니다), 사역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상황은 좋았습니다! 봉쇄 조치가 시행됐을 때, 저는 바쁜 일상으로부터 약간의 “휴식”을 가질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를 위해 전혀 다른 것을 예비하고 계셨습니다.


격리에 들어가고 얼마 되지 않아서 저는 몸이 쇠약해지는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해야 할 실질적인 것들 외에도, 모두 영적으로 올바른 조치를 취했습니다. 기도하며 주님을 찾았습니다. 말씀 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나아지기는 커녕 상황이 오히려 더 나빠졌습니다. 저는 제 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회개하며 더 기도했습니다. 제 삶을 향해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런데도 공격이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공격들이 계속 닥쳐왔습니다. 오랫동안 그랬습니다. 결국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이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크게 나아진 후에도 여전히 왠지 모를 트라우마를 느꼈습니다. 마치 바다 위의 격렬한 난파선에 타고 있다가 해안으로 떠밀려와 간신히 살아남은 것 같은 충격이었습니다. 저는 아가서 4장 6절에서 말씀하는 몰약 산을 올랐습니다. 몰약은 기름부음을 위한 기름에도 쓰이며 예슈아의 장례에도 사용된 성경에 나오는 고대 향료로 대개 고통과 죽음을 뜻합니다.


겟세마네 동산- 고통으로의 초청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마태복음 26:36~38


제가 힘들었던 시기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슈아께서 홀로 계신 장면이 자주 떠올랐습니다. 그날 밤 동산에서 예슈아께서는 가장 가까웠던 제자들인 베드로, 요한, 야고보에게 함께 머물며 당신께서 이제 곧 견뎌야 할 큰 고통과 씨름할 때 함께 해주기를 부탁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슈아의 가장 가깝고 소중한 이들은 그분과 함께 깨어 있기는 커녕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그분께서 핍박과 고통을 당하시기 시작할 때, 모든 제자들은 (요한만 제외하고) 그분을 버립니다. 우리는 보통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견디셨던 육신적인 고통을 생각하지만, 그 고통이 거의 모든 친구들에게 버림받고 궁극적으로 아버지의 임재에서 끊어짐으로 겪은 감정적 고통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었는지 생각하지 못합니다. 이는 다니엘 9장 26절에 예언된 것과 같습니다. “기름 부음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이분이 바로 우리가 따르고 본받아야 할 고난받는 종이십니다.


대중문화는 어떻게 우리 믿음을 변형시켰는가


얄팍한 세속 문화는 안타깝게도 교회 안에서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주된 갈망이 축복받고 번영하며 행복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도록 훈련시킨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믿는 자의 삶에서 어떤 종류의 고통이든 죄의 결과임이 틀림없다고 여기게 됐습니다. 저희 공동체의 한 성숙한 자매는 10대인 아들이 최근 있었던 가자 전쟁 중에 사망했다며 자신이 겪은 아픔을 제게 나눠주었습니다. 동료 신자들이 그녀의 고통과 상실이 죄의 결과라고 느끼게 했던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 가운데 불필요한 부분이 많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의 잘못된 선택과 죄악된 행동의 결과이며 하나님과의 관계에 시간을 들이지 않은 결과입니다. 그러나 신약에서 반복해서 명확히 밝혀주는 점은, 하나님의 뜻에 따른 고난이 실제로 존재하며(벧전 4:19) 우리가 메시아의 고난에 참여하도록 초청받았다는 사실입니다(벧전 4:12~17)


모두 사랑을 위하여


저는 한때 예슈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은 복음에 대한 직접적인 핍박을 통해서만 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도 일부 사실이지만, 다는 아닙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주된 열망이 우리가 그분과 다른 이들에 대한 사랑 가운데 성장하고 성숙하는 것임을 이해할 때, 우리는 이내 고통도 그 일부임을 알게 됩니다.


아가서 5장- 성숙한 신자를 겟세마네 동산으로 초청하심


유대교에서 아가서는 “지성소”로 여겨집니다. 아가서는 솔로몬 왕과 약혼한 술람미 처녀의 사랑에 대한 문자적 묘사 뿐 아니라, 영적인 차원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신성한 사랑의 여정에 대한 묘사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따르는 자들로서 아가서를 메시아의 신부(유대인과 이방인)가 신랑이신 왕을 향한 성숙한 사랑으로 성장하는 모습으로 봅니다.


아가서 5장은 성숙한 신부의 고통과 핍박에 대해 묘사합니다. 그녀는 동산으로 묘사되고, 다른 이들이 그녀의 삶에 분명히 나타나는 열매로 인해 축복을 누리고 강건케 됩니다(5:1). 그 시점에 그녀는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있기에 행복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신랑께서 자신을 새롭고 고통스러운 성장의 단계로 초청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예슈아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함께 깨어 당신의 고난에 참예하라고 요청하시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녀는 자고 있지만 마음은 깨어 있습니다(5:2): 예슈아께서 제자들이 잠든 것을 보실 때, 그분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셨습니다(마 26:41).


-밤에 홀로 밖에 계셨던 신랑께서는 그녀에게 함께 해줄 것을 부탁하셨습니다(5:2).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마 26:38).


-그녀는 뜻밖의 사건으로 혼란스럽지만, 결국 순종으로 반응합니다(5:3~5) - 요한과 여인들은 모두가 흩어지고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예슈아의 고난 내내 예슈아와 함께 머물렀습니다(요 19:25~26, 막 15:40-41).


-그녀는 그분께 문을 열지만, 그분은 거기 안 계셨습니다. 그분을 찾았지만, 그녀는 찾을 수 없습니다(5:6). 예슈아께서는 대다수에게 버림 받으셨고(마 25:56), 십자가에서 아버지로부터 완전히 분리되는 고통을 겪으셨습니다(마 27:46, 단 9:26).


-그녀는 권위자들에게 매 맞고 상함 받았으며 사람들은 그녀의 겉옷을 벗겼습니다(5:7). 주 예슈아께서도 유대와 로마 당국에게 매 맞으시며 상함 받고 옷도 벗겨지는 수모를 겪으셨습니다(마 26:67, 요 19:1).


이 모든 시련을 겪은 성숙한 신부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분을 향한 상사병이 났다고 외치며 예루살렘의 딸들에게 그분에 대한 가장 높은 찬양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이 얼마나 강력한 증인입니까! 다음 장에서 그녀는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셨으며”라고 선포합니다. 그녀는 자신을 그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알게 된 개인적 경험으로 그 고백을 합니다. 그래서 다음 장에서 그녀가 사랑하는 분께서 그녀에게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하다”고 하십니다(6:4).


그것은 연단의 불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이 개념은 저를 매우 두렵게 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분과 가까이 걸어갈수록 우리를 향한 그분의 마음을 더 많이 이해하게 되며, 때로 그분이 우리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하셔서 성숙, 사랑, 그분을 아는 것의 더 깊은 단계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알 수 있는 가장 참된 기쁨과 즐거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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