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아 콤플렉스
- Asher Intrater
- Jan 28,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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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동안 저는 이스라엘의 정치 지도자들과 은사주의 교회 지도자들의 비슷한 실수를 지적해왔습니다. 이것을 “메시아 콤플렉스”라고 명명했는데요. 어떤 면에서 그것은 전통적 사고방식을 지난 남성들의 자존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이스라엘을 통해, 혹은 교회를 통해 세상을 구하려는 열성이 덧붙여진 것입니다. 엄청난 은사가 있는 사람에게 거대한 자아와 더불어 정치 권력, 종교적 열성, 이스라엘과 마지막 때, 그리고 긴급한 상황 등을 더하면, 메시아 콤플렉스로 가는 것입니다.
예슈아께서는 인간의 타고난 은사와 능력에 있어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람이 세례 요한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말했죠.
요한복음 3:28, 30
내가 말한 바 나는 메시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요한은 자신의 부르심의 위대함을 “스스로에게” 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구주가 아님을 스스로에게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재빨리 상기시켰습니다. 그는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왕국에서 큰 역할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도 이 단순한 원리를 자주 상기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메시아가 아닙니다. 인류의 구세주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예슈아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부르심이 얼마나 중요하든, 우리가 중심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예슈아께서 중심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분이 핵심입니다. 우리 시대 이스라엘의 총리였던 분들이 얼마나 재능과 능력이 뛰어난지 보면 놀라울 정도입니다. 좌익이든 우익이든, 베긴, 라빈, 샤미르, 페레스, 네타냐후, 바라크까지 말이죠. 이들 중에 젊은 측에 속하는 네타냐후와 바라크는 스스로 상황을 “구원할” 사람이 되고자 하는 유혹에 더 크게 반응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둘 다 정부의 주변 사람들을 떨어져 나가게 만들고 곤경에 빠졌습니다.
예슈아께서 구세주이시며 우리는 이 땅에서 그분의 뜻을 행하는 인간임을 인식할 때, 겸손은 우리의 신앙에 반드시 공존해야 합니다. 모든 상황이 이상적인 것은 아니며, 일시적 타협의 여지를 만들어야 합니다. 물론, 도덕적 타협을 말하는 것 아닙니다. 도덕적으로 우리는 항상 절대적 기준을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이들과 협력하며 팀워크를 이룰 때, 선의를 가진 사람들이 각기 다른 의견을 갖는 상황에서 해결책을 찾을 때는 타협이 미덕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믿음의 지도자들 (사도들, 선지자들, 복음전도자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자신의 역할을 하나님 왕국의 성공의 중심으로 여기면서 막대한 손해와 분열을 일으켰습니다. 나의 사역이 중심 이슈가 되는 겁니다. 나의 부르심이 가장 중요한 것이 됩니다. 글쎄요. 과연 그게 옳을까요? 당신이 예수님이라면 그렇겠지만요. 그런데 그분은 다른 이들을 위해 당신의 목숨을 버려야 함을 아셨을 것입니다.
우리의 사역과 부르심의 중요성을 생각하는 것이 남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우선이 될 때 사탄에게 속한 교만이 됩니다.
마태복음 16:21~23
이 때로부터 예수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베드로는 예슈아께서 당신의 생명을 버리시기보다 당신 사역의 성공과 부르심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하시도록 설득하려 했습니다. 예슈아께서는 그러한 철저히 인간적인 태도를 사탄에게 속한 죄악이라고 꾸짖으셨습니다. 교만을 제하는 것이 은사, 부르심, 그리고 사역을 완수하는 것보다 주변 사람들에게 더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메시아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메시아를 주셨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