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에는 큰 믿음이 필요합니다
- Jeremiah Smilovici

- May 7
- 3 min read
티쿤 글로벌
이스라엘 예루살렘

우리는 종종 믿음을 치유나 기적, 돌파, 혹은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과 연결해서 생각합니다. 하지만 누가복음 17장에서 예슈아께서는 믿음을 훨씬 더 개인적이고, 고통스럽고, 자주 간과되는 주제인 ‘용서’와 연결하십니다.
이스라엘의 믿는 자로서 이 가르침은 제게 단순한 이론이 아닙니다. 10월 7일, 하마스 테러리스트들이 우리 민족을 학살하고 납치하며 이루 말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던 끔찍한 사건 이후, 저는 이 예슈아의 명령을 훨씬 더 깊이 직면해야 했습니다. 용서는 더 이상 성경 속의 멋진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믿음의 결단이 되었습니다.
예슈아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누가복음 17:3-4). 이것은 결코 쉬운 명령이 아닙니다. 예슈아께서는 반복되는 죄, 반복되는 회개, 그리고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반복되는 용서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 대부분은 상처가 아직 생생할 때 한 번 용서하는 것조차 어려워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준비되면 용서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용서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말씀의 무게를 이해했습니다. 그들의 반응은 “주님, 시간을 더 주세요”나 “기분이 나아지도록 도와주세요”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누가복음 17:5). 이 반응은 많은 믿는 자들이 놓치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진정한 용서는 믿음을 요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용서와 믿음을 분리합니다. 믿음을 기적을 받는 능력으로만 이야기하는데, 예슈아께서는 믿음이 고통스러운 순종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기도 한 것을 보여주십니다. 용서는 단지 감정이 따라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뢰의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로우시며, 모든 것을 보시고 아시며, 공의롭게 심판하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그분의 손에 상처를 맡기는 선택입니다.
이것은 악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테러를 정당화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자신을 방어해서는 안되다는 뜻도 아니고, 살인자들이 정의의 심판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성경적인 용서는 정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복수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기억하는 것은 정의의 일부이고, 용서하는 것은 순종의 일부입니다. 저는 악이 작아서가 아니라, 예슈아의 명령이 제 고통보다 크기 때문에 용서해야 했습니다. 정의를 구하는 대신이 아니라, 정의가 제 손 안에서 증오로 변하지 않도록 하나님께 맡기기 위해 용서해야 했습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을 감당하실 수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정의가 나의 복수보다 낫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내 손에서 누군가를 놓아준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의 진리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어난 일에 대해 아버지를 신뢰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무언가를 붙잡음으로써 스스로 보호하려 합니다. 쓴 마음은 때로 통제처럼 느껴지고, 원한은 마치 정의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믿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잊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나보다 더 분명하게 보신다. 하나님께 맡길 수 있다.”
이것이 주기도문이 매우 중요한 이유입니다. 예슈아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마태복음 6:12). 이것은 제자의 일상적인 삶의 일부입니다. 우리는 매일 자비를 구하며 아버지 앞에 나아가고,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를 흘려보내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가 용서를 구하면서도 마음에 쓴 마음과 분노를 붙잡고 있다면, 우리의 하나님과의 관계에는 모순이 생깁니다.
예슈아께서 친히 십자가에서 이 믿음의 완전한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부당한 고통 속에서도 그는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3:34). 이것은 약함이 아니었습니다. 현실을 부정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가장 순수한 형태의 믿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베드로전서 2:23). 이것이 용서의 기초입니다. 그분은 자신을 공의롭게 심판하시는 분께 맡기셨습니다.
용서는 큰 믿음을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용서는 내려놓음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쉽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예슈아의 길입니다. 좋은 소식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힘으로 용서하라고 명하신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분의 믿음이 우리의 힘이 되고, 우리에게 베푸신 그분의 자비가 우리를 통해 흘러가는 자비의 근원이 됩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기적을 보기 위한 믿음만이 아니라, 산을 옮기는 믿음만이 아니라, 용서하고 내려놓고 자유롭게 살아가기 위한 믿음을 위해서입니다.

